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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는 공산주의자' 모함 투서 최초 발견

도산 안창호 선생을 공산주의자(볼셰비스트)로 모함한 투서가 미 이민국에 접수된 사실이 최초로 확인됐다. 장태한 UC리버사이드 교수가 북가주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영문 투서 원본을 발견했다. 안창호 선생의 세 번째 미국 체류와 추방 과정을 확인하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9일 장태한 교수에 따르면 1924년 12월 15일 '콩 왕'과 '찰스 홍 이'라는 이름으로 서명한 투서가 노동부 산하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에 접수된 것으로 확인됐다. 장 교수는 최초의 한인타운인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에 집단 이주한 한인들의 입국 경로를 역추적하는 과정에서 북가주 샌브루노(San Bruno)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우연히 이 문서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샌타바버라 시 알링턴호텔 전용 편지지에 총 4장의 영문으로 작성된 이 투서에는 "볼셰비스트(사회주의자) 지도자가 (하와이) 호놀룰루를 거쳐 곧 도착할 예정이니 유심히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 사람 이름은 창호 안(Bolshevist leader your office look out…his coming via Honolulu…The person name is Chang Ho Ahn)"이라고 기재돼 있다. 투서에는 이어 "그는 미국에 여러 해 살았으며 그의 가족은 LA에 거주하고 있다. 그후 중국으로 건너가 6년 체류하면서 볼셰비스트 정부 관계자들과 친분관계를 유지했는데 그가 지금 미국으로 오고 있다(connected with Bolshevist Government…he is coming to U.S now)"라고 이민국 관리에게 경고하는 내용이 쓰여있다. 말미에 "이민국에서 대한인국민회를 특별히 조사하고 그(안창호)를 중국으로 조속히 추방하길 희망한다(best way to sending back to China quite as possible)"라는 문구도 들어있다. 투서에 연명 서명한 '콩 왕(Kong Wong)'과 '찰스 홍 이(Charles Hong Lee)'라는 사람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다. 장 교수는 이민국 자료와 당시 관련 사료를 뒤졌지만 이들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다만, 당시 대한인국민회와 대립 관계에 있던 대한인동지회의 이승만계 추종 세력이 투서를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고 장 교수는 추정했다. 이 투서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24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 접수됐지만 이민국 담당자에게는 미처 전달되지 않아 도산 선생은 당시 미국으로 입국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25년 6월 3일 도산 안창호 선생은 시카고 노동부 산하 이민국에서 J.B 브래키 이민국 검사관으로부터 미국 입국 경위와 체류 행적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 장 교수는 당시 검사관과 안창호 선생의 직접 심문 기록을 전문 공개했다. 검사관은 심문에서 안창호 선생에게 '소련 정부 또는 러시아에 관심이 있는가' '강연 내용 중에 미국 정부가 과격하게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나' 등의 심문 문항을 제시하며 캐물었다. 이 점에 비춰 도산 선생을 공산주의자로 모함한 투서가 이민국에 접수된 이후 안창호 선생에 대한 심문 파일이 작성됐고 그에 따라 직접 심문이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1925년 7월 22일 샌프란시스코 엔젤섬 이민국 문서는 안창호 선생에게 8개월 체류 연장을 허가했음을 입증했다. 그러나 미 이민국은 안창호 선생의 체류 연장을 허락하면서도 볼셰비스트인지 여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채 요주의 인물로 분류한 것으로 보인다고 장 교수는 주장했다. 1926년 2월 6일 엔젤섬 이민국 문서에는 "안창호가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는 배에 타는 것을 확인하라"고 적혀 있다. 또 1926년 2월 23일 이민국 문서에는 "중국인 도산 안창호가 S.S.소노마에 승선한 것을 사진과 함께 확인했다"고 돼 있다. 이민국이 사실상 도산의 강제 추방을 마지막 순간까지 확인했음을 방증하는 자료다. 안창호 선생은 결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하와이를 거쳐 호주로 추방됐다. 도산은 하와이에서 6시간 체류하며 감리교회에서 150명의 한인동포를 상대로 연설하고 바로 호주로 떠났다. 이후 안창호 선생은 중국으로 돌아간 뒤 1932년 가족이 있는 미국을 다시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윤봉길 의사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거사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이후 풀려났다가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다시 체포된 뒤 1937년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이듬해 3월 타계했다. 이번 투서를 포함한 사료 발견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 이민국에 접수된 투서에 의해 공산주의자라는 모함을 받고 요주의 대상으로 조사를 받다가 강제 추방된 과정이 사실이었음을 입증하는 자료를 찾아낸 것이라고 장 교수는 의미를 부여했다. 그동안 안창호 선생의 세 번째 미국 체류 행적(1924~1926년)에 대해서는 방문기간 흥사단과 대한인국민회 동지들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고 미주 교민들을 규합한 정도로만 기록돼 왔으나 이번 사료 발견에 따라 미 이민국의 조사와 체류연장 서류 처리, 추방 조처 등의 구체적 행적이 드러난 것으로 평가된다.

2017-08-09

도산 선생 업적 통해 정체성 조명

북가주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독립운동 활동과 업적을 조명해보는 시간이 마련됐다. 한인 단체인 ‘북가주 공감’이 도산 선생의 외손자인 필립 커디씨를 초청해 개최한 강연회를 통해서다. 이날 강연회는 지역 한인 100여 명이 참석했으며, 아이들의 손을 잡고 찾은 가족 참가자들이 많았다. 필립 커디씨는 이날 강연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도산 안창호 선생을 독립운동가로 기억하지만 정진사상과 교육개조를 주장한 사회사상가라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이라며 “특히 안창호 선생은 교육을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교육을 통해 사람들이 무실, 역행, 충의, 용감 등 안창호 선생의 4대 정신을 배양하도록 했다. 흥사단을 설립한 것도 이런 이유”라고 설명했다. 커디씨는 “미국에서도 도산 선생의 뜻을 기려 LA에 우체국과 인터체인지에 안창호 선생의 이름을 명명했다”며 “절반의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나는 할아버지의 뜻을 잘 계승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앞으로 그의 사상이 잘 보존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커디씨는 그동안 보관해온 안창호 선생과 관련된 사진들을 하나 하나 보여주며 미주 한인들의 역사를 설명했고, 특히 샌프란시스코 오크 스트리트에서 설립된 대한인국민회와,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를 중심으로 한 활동 등 북가주에서 펼쳐졌던 독립운동들도 자세히 소개했다. 또 안창호 선생의 큰 아들이자 할리우드 배우로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던 필립 안은 물론 자신의 어머니인 안수산 여사에 대해서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필립 커디씨는 또, 한국정부가 안창호 선생과 관련돼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커디씨는 “이승만 정권이 남한에 들어서며 외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활동을 축소 왜곡했다”며 “수많은 자료들을 통해 미주에서 펼쳐졌던 독립운동 역사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최근 공개된 국정교과서에서도 관련 내용이 잘못 기재되는 등 한국정부는 이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필립 커디씨는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께서 한국으로 떠나며 가족들에게 좋은 미국 시민이 되라, 하지만 한국인이라는 뿌리는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다”며 “이 말은 우리 가족뿐만이 아닌 미국에 사는 모든 한국인들에게 남긴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도산의 사상을 연구하며 살 것”이라고 밝혔다. 안창호 선생의 장녀인 안수산 여사와 아일랜드계 이민자인 프랭클린 커디씨 사이에서 태어난 필립 커디씨는 LA 미주한인 역사박물관 사무총장, 미주도산기념사업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한국의 독립기념관에서 도산 선생 연구를 맡기도 했다. 현재는 한국학교 등에서 한국 역사를 가르치고 있으며 도산의 업적을 기리는 디지털 도서관 구축 활동도 펼치고 있다. 최정현 기자

2017-02-06

도산 안창호 선생 건립 최초 한인촌 사적지 지정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04년 세운 리버사이드 한인촌 '파차파 캠프'가 사적지(Historic Site)로 지정됐다. 리버사이드 시의회 산하 문화위원회는 6일 시의회 회의실에서 파차파 캠프 사적지 지정안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리버사이드 시는 남가주 최초 한인촌인 파차파 캠프 건립 장소에서 내년 3월23일 사적지 지정 기념식을 열고 한인 이민역사를 기념할 예정이다. 파차파 캠프는 1904년 도산 선생이 리버사이드다운타운에 세운 한인촌이다. 당시 오렌지농장에서 인부로 일하던 한인 10여 가정의 50여 가족이 판잣집을 짓고 살던 곳이다. 당시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 지역은 1880년대 중국계 철도 노동자 이주를 시작으로 한인들이 자리잡은 곳이다. 이곳에서 도산 선생은 한인 노동자와 함께 근면성실을 실천하고 조국 독립운동의 기틀을 다졌다. 이날 시의회 회의실에서 도산 선생의 막내 아들 랄프 안(91)과 미주도산안창호 기념사업회 홍명기 총회장이 사적지 지정을 지켜봤다. UC리버사이드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은 "도산 선생은 리버사이드 한인촌에서 신민회와 흥사단 활동 등 미주 독립운동 초석을 다졌다"라며 "파차파 캠프 사적지 지정은 미주 한인사회의 자랑스러운 날"이라고 말했다. 김형재 기자 kim.ian@koreadaily.com

2016-12-06

도산 우체국, 주상복합 호텔로 바뀐다

LA한인타운의 상징 중 하나인 도산 안창호 우체국이 10층 주상복합건물로 바뀌게 생겼다. 로컬 부동산 개발업체 어반 커먼스(Urban Commons)는 6가와 하버드에 위치한 도산 안창호 우체국(3751 W. 6th St·사진) 자리에 주거용 유닛 44개와 객실 200개를 갖춘 10층 높이 주상복합건물로 개발하겠다는 서류를 LA시 개발국에 최근 접수했다. 이 개발안에 따르면, 44유닛 아파트는 1·2베드룸으로 구성되며 1층과 2층에는 1만8000스퀘어피트 크기의 상가도 들어선다. 또 지하 3층 규모의 주차장도 지어진다. 하지만 이 계획은 현존하는 건물을 완전히 철거하고 신축하는 프로젝트라서 승인될 경우 도산 안창호 우체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현 건물 소유주는 UCCH LLC로 올해 5월 한인 소유주로부터 1400만 달러에 매입했다. 우체국 건물의 면적은 1만6854스퀘어피트이며 대지는 3만4589스퀘어피트 규모로 현재 연방 우정국이 임대해 사용하고 있다. 부동산 업계 관계자들은 2017년 8월이 지나면 우정국과의 임대계약도 종료되는 데다 조닝도 상업용인 C2여서 인수 업체가 주상복합건물을 개발할 것으로 예상해왔다. 하지만 현 소유주가 우체국 건물을 철거하고 상업용 건물을 개발하려면 우정국이 장소 이전에 대해 동의해야 하고 우체국 폐쇄에 반대하는 지역주민과 시정부도 설득해야 하기 때문에 재개발 추진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진성철 기자

2016-11-24

인랜드한인회, 도산 '온라인 홍보' 지원한다

인랜드한인회(회장 데이비드 곽)는 한국 독도를 알리고 동해 표기에 앞장서 온 민간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단장 박기태)와 함께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한국어와 영어 동영상을 제작하고 이를 유튜브를 통해 홍보하는 데 적극 협력하기로 했다. 인랜드한인회에 따르면 한인회측은 리버사이드를 방문한 반크 21세기 신헤이그 LA특사팀과 만나 이러한 내용에 대해 협의했다. 또 미국 교과서는 물론, 세계지도와 웹사이트에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됐거나 한국의 역사가 왜곡된 내용을 공동으로 조사 및 발굴하여 시정 노력을 하는 등 '한국 바로 알리기' 사업도 지원하기로 했다. 이 외에도 미국의 한인 차세대들과 반크 회원들이 함께 한국 홍보 캠페인을 공동으로 전개한다는 데에도 뜻을 모았다. 이날 업무협력 간담회에 함께 했던 미주한인총연한인총연합회측도 10월에 열리는 세계한인회장대회에서 전세계 한인회장들을 대상으로 독도와 한국을 홍보하는 세계지도, 한국지도를 반크에서 제공받아 알리는 캠페인 추진을 고려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반크 21세기 신헤이그 LA 특사팀은 지난달 LA에 도착한 후 리버사이드시에 있느 도산 선생의 동상을 참배했으며, 마틴 루터킹, 간디 동상과 함께 도산 안창호 선생의 동상이 리버사이드시에 설치된 과정 등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황인국 기자

2016-08-31

[추모의 글] 도산의 딸 안수라 여사를 추모하며

도산 안창호의 둘째 딸로 태어나 LA에서 한 세기를 자랑스럽게 살아온 안수라 여사가 우리 곁을 떠났다. 향년 99세를 일기로 지난 6월 18일 별세, 오는 7월 10일 장례식 후 그렇게 존경하던 큰 오빠 안필립(영화배우·도산의 장남) 곁에서 영면에 들어간다. 안수라 여사는 도산 안창호와 이혜련 여사 사이에 3남 2녀 중 둘째 딸로 1917년 다운타운 흥사단 단소에서 출생했다. 아름다움에 조용한 성품을 지녔고, USC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독립운동에 나선 아버지가 순국한 후 어려서부터 집안의 경제문제를 책임져야 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196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효녀로 가장 가깝게 모셨다. 무엇보다도 안수라 여사는 1954년 오빠와 언니, 동생과 마음을 모아 파노라마시에 중국식당 문게이트(Moongate)를 오픈, 40년 동안 성공적으로 경영을 했다. 어머니 이혜련 여사의 생일 때마다 흥사단, 국민회, 여자애국단 단우를 초청해서 자주 잔치를 베푼 곳이 바로 문게이트였다. 한국의 흥사단 임원들이 LA를 방문할 때마다 꼭 찾았고, 파노라마시의 최고 식당으로 자리를 잡았다. 안수라 여사는 미국 방송인과 결혼, 행복한 가정을 꾸몄고, 무엇보다도 5남매와의 우의를 가장 중요시했다. 항상 가정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었다. 안수라 여사는 말수가 적었고, 빙그레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따뜻한 마음에다 늘 자상한 모습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워 했다. 도산 안창호가 빙그레 웃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고 했는데 항상 빙그레 웃는 모습을 보인 딸이 바로 안수라 여사였다. 한인사회 주요 행사 때에는 막내동생 안필영씨와 자리를 함께 했다. 아버지 도산 안창호가 세운 대한인국민회의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 옛 친지들을 반갑게 만나서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리고 2014년에는 어머니가 평생 사용하던 재봉틀과 고이 간직해온 아버지의 서신, 책, 사진 등을 한국 도산기념사업회에 영구 기증했다. 안수라 여사는 천수를 누리고 이제 우리 곁을 떠났다. 도산의 딸로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아름다운 삶은 우리에게 오래 기억될 것이다. 아버지 도산이 돌아가신 후 가정의 경제를 책임졌던 자랑스러운 둘째 딸. 언제나 빙그레 웃던 안수라 여사를 생각하며 삼가 명복을 빈다.

2016-07-03

[기고] 다시 생각하는 도산의 '주인 정신'

오늘(10일)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순국한 지 78주기를 맞는 날이다. 도산은 인격적인 지도자이면서 혁명가이자 교육자였고 민족의 위기에 방향을 제시했던 사상가였다. 독립운동의 방략을 설계했고 대한민국의 비전을 계획했다. 나아가 우리 민족이 아시아의 평화와 세계와의 공존공영을 위해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를 제시하고 몸소 실천했다. 도산은 과거의 인물이 아니다. 그의 업적은 과거의 일이지만 인격과 사상은 아직도 우리 민족에게 남아 있는 위대한 유산이다. 지금 한국과 주변 국가들이 처한 상황을 보면서 도산이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 본다. 민족의 분단은 고착화돼 가고 남북간 갈등은 전쟁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다. 최근에는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골이 더 깊어지고 있고 이로 인해 동북아시아 정세는 더욱 불안해졌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 민족으로서 통일국가를 이뤄야 한다는 절대적인 사명을 갖고 있다. 한국은 민주화에 이어 정보산업의 발전으로 세계 강대국으로 발돋움 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주의가 팽배해 해결해야 할 과제가 한 둘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청소년들에게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가치관을 심어 줌으로써 장차 나라를 이끌고 나갈 수 있는 역량을 키우게 해야 한다. 또 인성과 창의성에 바탕을 둔 교육으로 청소년들의 품격을 높이고 세계와 겨룰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게 해야 한다. 지금 지구촌은 자원개발로 인한 환경파괴,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 핵 전쟁의 위협 등으로 위험에 처해 있다. 인류 문명의 위기다. 이런 상황에서 도산의 합리적이고 민주적이며 헌신적인 리더십이 더 생각난다. 도산은 60 평생을 민족의 독립과 번영만 생각했다. 둥근 돌이나 모난 돌이나 다 쓰임새가 있다고 강조하고, 분열된 조직과 이념을 조화롭게 화합시키고자 노력했다. 또한 단체와 사업을 일으켜 힘을 길러 민족의 미래에 거름이 되고자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무엇보다 먼저 건전한 인격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 순국 78주기를 맞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도산의 주인 정신이다. 철학자 안병욱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도산에 의하면 주인정신은 독립정신과 책임정신이다. 우리는 오대주인(五大主人)이 되어야 한다. 첫째로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요, 둘째는 내 가정의 주인이요, 셋째로 나의 마을의 주인이요, 넷째로 내 직장의 주인이요, 끝으로 내 나라의 주인이다. 일제시대에 우리는 나라의 주인 구실을 못하는 가짜 주인이었다. 주인 구실 할 줄 아는 주인이 참된 주인이요, 진짜 주인이다. 한 집에 주인이 없으면 그 집은 남에게 빼앗기고 만다. 우리는 당당한 독립 능력과 용감한 책임정신을 지니는 주인다운 주인이 되어야 한다." 주인 정신이 한국인 모두의 가슴 속에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 이 정신이 바로 도산이 그토록 강조했던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의 정신이다. 고국을 떠나 미국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숨결이 흐르는 조국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지금의 한인사회를 있게 한 원동력은 이민 선조들의 피와 땀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도산의 애국, 애족, 애민의 철학과 삶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그의 뜻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도산이 항상 강조했던 '훈훈한 마음, 빙그레 웃는 얼굴'로 품격있는 한인사회를 만들어가야겠다.

2016-03-09

애국지사 후손들, '아버지 도산' '할아버지 김호'를 말하다

미주 독립지사들의 삶을 후손들을 통해 듣는 뜻깊은 행사가 LA에서 열린다. 격랑치는 역사속 인물 이전의 아버지로서, 할아버지로서 인간적인 모습들이 소개된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이사장 권영신)은 광복회 미서남부지회(회장 배국희), 한인 역사박물관(관장 민병용) 공동 주최로 10일 '애국지사 후손 초청 독립운동 강연회'를 개최한다. 행사일인 10일은 도산 안창호 순국 78주년이다. 뿐만 아니라 지난 1일 남가주 대표 한인단체들이 최초로 한자리에 모여 연합 개최한 3.1절 기념식의 감격을 이어가자는 의도도 있다. 강연회 연사는 도산의 막내아들인 랠프 안, 김호의 외손자 스튜어트 안, 송헌주의 증손자 마크 김 판사, 전명운 의사의 사위인 표한규씨 등 4명이다. 대한인국민회의 권영신 이사장은 "미주 대표 독립유공자 후손 4명이 한자리에 모여 연설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연설 내용은 행사 부제대로 '우리 집안 독립운동을 말하다'다. 민병용 관장은 "그들의 인간미를 소개해 역사책속의 인물이 아닌 지금도 살아 숨쉬는 '미주 독립운동의 정신'을 알리고자 했다"고 취지를 전했다. 민 관장의 설명대로 미주 독립운동사를 아는 한인들은 드물다. 랠프 안은 아버지 도산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도산이 1926년 미국에서 상해로 가던 그해 태어났다. 도산은 1938년 사망할 때까지 중국과 일본에서 2차례 옥고를 치르느라 생전에 막내 랠프를 안아보지 못했다. 90세 백발이 된 막내 아들이 전하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이민자라면 공감할 이야기다. 스튜어트 안의 외조부 김호는 '김브라더스'라는 과일회사 공동 설립자로 1920~30년대 큰 돈을 벌어 미주 독립운동 조직과 모금에 앞장선 인물이다. 그의 영문 이름을 따서 LA한인타운에 세워진 학교가 '찰스 김 초등학교'다. LA카운티법원 마크 김 판사의 증조부 송헌주는 1907년 광무황제의 밀명을 받은 '헤이그 밀사'들의 통역관으로 네덜란드에 동행했다. 표한규씨의 장인 전명운 의사는 1908년 3월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친일외교관 듀함 스티븐스 저격에 장인환과 나선 의열투사다. 이 저격사건을 계기로 미주에서 독립운동이 본격 확산됐다. 후손들이 전하는 한인 선조의 뜨거운 애국심은 10일 오후 6시 옥스포드 팔래스 호텔에서 들을 수 있다. 2부 행사에서는 '미주 독립유공자 전집'의 저자 민 관장의 강연도 예정됐다. ▶문의:(213)321-0884 정구현 기자 chung.koohyun@koreadaily.com

2016-03-07

안창호 "우물 안 개구리인 조국 위해 교사 될 것"

25세에 초등학교 다녀 화제 인물로 도산 반듯한 모습 "기품있다" 묘사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02년 미국 일간지와 한 인터뷰 기사가 UC리버사이드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소장 장태한 교수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됐다. 장 교수는 6일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이 1902년 12월 7일자 11면에 도산의 인터뷰를 실은 사실을 확인하고, 지면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1865년 창간된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현재도 발행되는 미 서부의 유력일간지다. 기사의 제목은 '한국, 잠자는 나라(Corea The Sleeping Land)'다. 전면 인터뷰 중 3분의2 가량은 "한국인은 귀신을 섬기며 여성은 자유가 없다"는 당시 국내사정이었다. 도산은 당시 25세였지만 미국의 교육 시스템을 배우려는 목적으로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이게 화제가 돼 현지 언론이 인터뷰를 요청하게 됐다. 한국에서 2년간 의료선교 활동을 했던 알레산드로 드류 박사가 통역을 맡았다. 도산은 인터뷰에서 "나는 미국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지금 한국 민족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어렸을 땐 서양인을 악당이라고 생각했지만, 서울에서 학교(구세학당)를 다니면서 서양인을 본 뒤 달라졌다. 외국에 나가면 행색이 초라하기 마련인데, 서울의 외국인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본국은 얼마나 대단할까'라고 궁금해 했다"고 밝혔다. 도산은 "동포를 도우려면 외과의사가 되는 게 좋겠지만 마음이 약해 수술을 집도할 자신이 없다"며 "교사가 장래 희망"이라고 말했다. 또 "내가 여기서 보고 배운 모든 걸 한국으로 가져갈 순 없겠지만, 1000가지 중 단 하나만이라도 보석과 같은 핵심을 얻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후원을 받고 지인들이 도와줘 여비를 마련했다. 그들이 내게 보여준 신뢰에 대해 부담이 크다"고도 털어놓았다. 미국인 기자는 도산의 모습을 보고 "기품있다(dignified)"고 썼다. 도산학회 윤경로 회장은 "도산이 미국 신문과 인터뷰를 한 사실은 알려졌지만 그동안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며 "도산의 청년시절 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라고 평가했다.도산은 1902년 9월 4일 부인 이혜련 여사와 함께 신 문화를 배우기 위해 인천에서 기선을 탔다. 결혼한 지 넉 달 만이었다. 도쿄→하와이→샌프란시스코의 여정이었지만, 하와이에서 배를 잘못 갈아타 캐나다 밴쿠버로 갔다. 이후 시애틀을 거쳐 그해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빈털터리였던 그는 지인인 드류 박사를 차이나타운에서 우연히 만나 그의 집에서 집사로 일하며 머물렀다. 이철재 기자

2016-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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